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김정한 시인의 ´사랑은 아름다운 손님이다´ 외
<사랑을 정의하는 시 모음>
김정한 시인의 ´사랑은 아름다운 손님이다´ 외
+ 사랑은 아름다운 손님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손님이다
사랑은 자로 재듯
정확한 날짜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소나기처럼
갑자기...
때로는 눈처럼
소리 없이...
때로는 바람처럼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래서 사랑은 손님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손님이다
아름다운 손님,
그게 사랑이다
(김정한·시인, 경북 상주 출생)
+ 사랑의 역설
사랑은 털도 안 뽑고 꼴깍 삼키는 거지
사랑은 솜털 하나 남기지 않고
지져 먹던 볶아 먹던 마음대로 하라고
몽땅 주어버리는 거지
그러다 보면 너와 나 한 불길로 타오르는 거지
잠자던 바람 덩달아 일어나
나부끼다 춤추다 쓰러지다 치솟다
세상 울리는 마음이 되는 거지
(문익환·목사이며 시인, 1918-1994)
+ 그것이 사랑
서로의 거울이 되는 것.
서로의 눈물이 되는 것.
서로의 책이 되는 것.
서로의 길이 되는 것.
서로에게 꽃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
(백승임·일러스트레이터)
+ 마지막 사랑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장석주·시인이며 소설가, 1954-)
+ 있었던 일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일
적어도 남이 보기엔
없었던 것으로 없어지지만
우리 둘만의 좁은 속은
없었던 일로 돌아가지 않는 일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겉으로 보기엔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나 있었던 일
(이생진·시인, 1929-)
+ 인연서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문병란·시인, 1935-)
+ 사랑이란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가 어깨동무하듯
그렇게 눈 비비며 사는 것
조금씩 조금씩 키돋움하며
가끔은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게
하늘 바라보는 것
찬서리에 되려 빛깔 고운
뒷뜨락의 각시감처럼
흔들리지 않게 노래하는 것
계절의 바뀜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는 것
새벽길, 풀이슬, 산울림 같은
가슴에 남는 단어들을
녹슬지 않도록 오래 다짐하는 것
함께 부대끼는 것
결국은 길들여지는 것.
(양형근·시인)
+ 그대의 별이 되어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허영자·시인)
+ 참으로 사랑해 보라
꽃은 다투지 않는다.
꽃과 꽃은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지만
얼마나 마음이 고귀한가.
태양을 향해 불사르는 저 꽃들의 혼!
물은 다투지 않는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정답지 않은가
이윽고 바다에 이르면 큰 하나가 된다.
혼을 울리는 저 파도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지는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흐르는 강물은 바다에 닿기 위함이다.
흐르고 흐르는 물처럼
피고지고 피고지는 꽃처럼
더 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겨울이라 탓하지 않듯
개울이라 탓하지 않듯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참으로 사랑해 보라.
(김용화·시인, 1971-)
+ 참말로의 사랑은
참말로의 사랑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나를 미워할 수 있는 자유를 한꺼번에
주는 일입니다.
참말로의 사랑은 역시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머물 수 있는 자유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따지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바라만 보다가
반쯤만 눈을 뜨고
바라만 보다가.
(나태주·시인, 1945-)
+ 사랑한다는 것
너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포개어
두 마음이
다정히 한마음 되는 것
너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만나
두 눈빛이
순하고 고운 별빛이 되는 것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서로에게
은은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
너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만나
그 기쁨이
두 배로 커지는 것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만나
그 슬픔이
신비하게 작아지는 것
네가 내 곁에 없어도
가만히 눈감으면
너의 모습이
두둥실 내 맘에 떠오르는 것
이따금 네가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네가 꽃처럼
예뻐 보일 때도 종종 있는 것
어쩌다가 맛있는 것을
너 없이 먹을 때면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잠시 목이 메이는 것
세상살이가
힘들어 울고 싶다가도
너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며
다시금 불끈 힘이 솟아나는 것
한세월 살다 가는 인생이
덧없이 여겨지다가도
너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이따금 영원처럼 느껴지는 것
(정연복,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