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도종환의 ´어떤 편지´ 외



<편지 시 모음> 도종환의 ´어떤 편지´ 외

+ 어떤 편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도종환·시인, 1954-)
+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시인, 1927-)
+ 편지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천상병·시인, 1930-1993)
+ 풀꽃 편지

내 편지는
지금쯤 어딜 가고 있을까

낯선 우체부 고마운 마음 같은
큰 가방 속에 있을까

아니, 아직 시원한 들판을
기차 타고 달리고 있을까

아니, 겨우 우리 마을 우체국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부친 지 하루도 안 되었는데
갈피 속의 풀꽃 시들었을까.
(유경환·시인, 1936-2007)
+ 당신은 내 소중한 편지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편지입니다.

날마다
내 삶의 편지지에
즐거움과 기쁨의 밀어로
빛고운 향기로 편지를 쓸 수 있으니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보고픔과 그리움으로
긴 편지를 쓰게 합니다.

밤마다
흔들리는 불빛의 그리움처럼
슬픔과 아픔의 조각들로
눈물 젖은 석양의 노을빛 사연으로
기다림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윤석구·시인, 경기도 이천 출생)
+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안도현·시인, 1961-)
+ 편지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를 펄럭이는
편지
(박라연·시인, 1951-)
+ 거울에다 쓴 편지

해는 서편으로 돌려보내고
비는 개울로 돌려보내고
그대가 보낸 노래는
다시 그대에게 돌려보낸다.
꽃은 꽃에게로 돌려보내고
바람은 불어온 창 밖으로 돌려보내고
그대는 그대에게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어이 하리,
이 그리움, 이 슬픔은
돌려보낼 곳이 없구나.
(강창민·시인, 1947-)
+ 밤에 쓰는 편지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나호열·시인, 1953-)
+ 마음의 우체통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마음의 우체통을 열어 본다
오늘은 어떤 사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무지개 편지를 쓴다

손 모아 기도를 드리듯
또박또박 순정의 잉크방울로
마음의 편지지를 물들인다

발신인이 없어도
수취인이 없어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말없이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대 영혼을 울리는
그대 귓전을 맴도는
사랑한다는 그 말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편지를 쓰고
날마다 마음의 우체통을 열어 본다
(전병조·시인)
+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어느 해 늦가을 어머니께서는
평생 처음 써보신 편지를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자식에게 보내셨지요.

서툰 연필 글씨로
맨 앞에 쓰신 말씀이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국민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셨지만
어찌어찌 익히신 국문으로
˝밥은 잘 먹느냐˝
˝하숙집 찬은 입에 잘 맞느냐˝
˝잠자리는 춥지 않느냐˝

저는 그만 가슴이 뭉클하여
˝만이˝ 웃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밤에는
그 해 가을처럼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하숙집을 옮겨다니다가
잃어버린 편지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릴없이 바쁘던 대학시절,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때까지
책갈피에 끼워두고
답장도 못해드렸던 어머님의 편지를.
(서홍관·의사 시인, 1958-)
+ 하늘로 띄우는 편지

내 편지는
밤 새워 썼어도 늘 백지였다

백지 편지를 고이 접어
하늘 특별시
번지는 없음 이라고 써서

석등처럼 서 있는 우체통에 넣고 나면
밤별들이 파랗게 웃곤 했었다

소나기가 후드득 스쳐도
젖지 않았을 내 편지는
달포 해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찬이슬 맞아도 별인 너는
나의 나아종 지닌 이기에
답장이 없어도 고깝지 않아

달빛이 통밤을 지켜주는 밤이면
나는 잠들지 못하고
조곤조곤
또 너에게 편지를 쓴다
(박해옥·시인, 부산 출생)
+ 하늘편지·1 - 詩人의 아내에게

팔자가 더러워 詩人을 만났지
간밤에 재수 없는 꿈을 꾸고
돌 던지는 마음으로 살아
詩人이 술을 걸칠 때 작부가 되고
간이 상한다 하며 술, 담배 말리지 말 것
詩人은 냉수를 자주 찾지만
위장이 뒤틀려도 탈나지 않으니 안심해
詩人은 공중에 나는 새처럼 내가 기르고
항상 깨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
詩人은 세상의 불의를 보지 못해 시를 쓰고
가난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칼날이지
매일같이 술에 적시고 육신은 죽어가지만
詩人의 뇌리엔 튼튼한 꿈을 꾸고 있어
詩人은 홧병같은 시를 그리고
한 뼘의 땅속에 싸늘하게 묻히지
무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말고
詩人의 아내도
약한 자에게 힘이 되고, 사랑이 되고
아픔이 되어야 해
누구의 아내도 부러워 말고
그이에게 항상
시를 쓰도록 기도해.
(류명선·시인, 1951-)
+ 마지막 편지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게 놓여진 시간 앞에 나는 다만
정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시 당신을 사랑할 기회가 생긴다 해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한 번뿐
더 이상의 사랑은 내게
무의미한 반복입니다.
(김재진·시인, 1955-)
+ 새벽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곽재구·시인, 195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