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널을 지나면서
정영숙
모처럼 기차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다 낭만적인 감정이 솟구쳐 여고 시절에 불렀던 가곡을 조용히 콧노래로 불렀다.
다음 정거장에 내릴 때쯤 되어서 창밖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가을꽃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뒤엉켜 서 있었다. 곧 겨울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올 터인데 한 송이 꽃만 외로이 서 있다면 안쓰러웠을 것인데, 서로서로의 줄기를 기대며 감고 있는 꽃무리를 보라보니 믿음직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간이역에서 기차는 멈추었다. 갑자기 소란한 분위기이다. 왜 이렇게 떠들썩 하는가 했더니, 귀여운 놀이방 꼬마들과 유치원 꼬마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선생님의 호루라기에 맞추어 ‘하나 둘 하나 둘’하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말소리가 예뻐서 볼을 만져보고 이야기를 시켜 보았다. 꼭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내 손자손녀를 만난 것 같은 기쁨과 즐거움이다. 발착역에서 앉았던 내 자리도 꼬마들에게 내어주고, 1시간을 이리저리 도망 다니듯이 자리를 찾아 다녔는데도, 신경질이 나지 않고 좋았다. 꼬마들이 와글와글 대며 내렸다. 내가 아쉬워 손을 흔드니까 저희들도 손을 흔들며 ‘빠이빠이’를 하였다.
햇빛 찬란함을 헤엄치며 기차는 달렸다. 기다란 몸체에 사람을 많이 태우고 두 줄의 철로 위에 서서 기염을 토하며 달리는 기차는 마치 곡예사와 같았다.
기차의 곡예를 느끼며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이 차 안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정하게도 햇빛은 소리 없이 숨어 버렸다. 햇빛이 없는 세상에 무엇을 보란 말인가. 책을 덮어두고 눈을 감으며 추억을 한점한점 풀어보았다.
추억은, 무지개처럼 오색찬란한 것도 아름답지만, 철부지 때 저지른 실수나 사춘기 때 숨겨 놓았던 움트는 사랑의 감정도 아름답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질수록 옛 친구들을 만나 히히닥거리며 추억을 나누어 본다. 하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고 뒤돌아 볼 수 있는 추억은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승리의 순간이리라.
내 나이 70을 오르면서 작은 터널 긴 터널을 많이 지나왔다. 그러나 이 터널이 지나가면 밝은 햇빛이 들어오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기다렸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요, 인생 선배들의 경험을 들었기 때문이다. 제법 긴 터널을 지나오니 한꺼번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이 밝음. 온 천지가 눈을 뜬 것 같다.
우리 삶에는 장애물도, 가시도, 바위도, 망망한 바다도 있어 앞길에 대한 두려움의 벽이 높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늘구멍만큼 살 길을 열어놓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하신다. 그르니 당황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며 담담한 마음으로 살면, 분명이 아침 해를 보리라 확신한다.
가을이 떠나려고 온 몸을 흔드니
내 마음도 가을 따라 흔들려
기차를 탔다.
두줄밖에 되지않은 철로위를 나는
무엇을 믿고 달리는지
찰라의 순간에 보인다
노란 아주 노란 들판이
연약한 듯 질긴 코스모스 무리들이
간이역에 노랑빨강 단복을 입은 꼬마들이
산은 왜 배신의 붉은 옷을 갈아입고
제 편이 되어 오라고 유혹하는지
찰라의 순간에 보인다.
갑자기 확! 갑자기 사이렌도 불지 않고
캄캄하다. 이게 무언가?
기차발통 소리만 들컹들컹 들릴뿐이다
심장이 싸늘해지다가 쿵!쿵
위를 향해 저항할 능력도
앞을 향해 달릴 힘도 없다
준비 없는 어둠이다
두 줄뿐인 철로 위를 벗어나 도망갈
길은 없다. 아래로 도망치면 지옥이다
그냥 하늘이 정한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담담이 내 좌석에 앉아있을 뿐이다.
어둠이 무서워 철로 아래로 뛰었으면 후회렸다
보인다. 해가 활짝 웃는 모습이 보인다
잘 참았다. 참 잘 기다렸다
어둠이 무서워 철로 아래로 뛰었으면
후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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