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삭발

쌓였던 눈이 녹으니
질퍽해진 마음의 진흙
날 선 칼로 삭둑 잘라내니
산사로 가는 길이 환하다
산발한 머리털을 밀어버리니
새벽이 파르라니 빛난다
숨어 있던 절 한 채 보이고
가부좌 튼 부처
집 떠나온 것들을 반기려고
한데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다
꽃과 나무들은 이미 머리 다 깎고
용감하게 화두를 밀고 나가고
몇몇 들짐승들은 뉘우치듯
제 스스로 털 뽑으며
금식의 동안거에 들었다
날개 가진 것들은 둥지를 버리고
알 같은 암자에 숨어들었다
떨어진 머리카락을 밟고
절 찾아가는 길이
절벽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삭발이란 맨발로
가파른 벽의 끝에서
우뚝 서는 것이겠다
혈서로 쓴 맹세같이 붉겠다
얼어붙은 빙판 같아서 독하겠다
삭발한 나의 눈빛 속에서
불시에 물러날 수 없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