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시간을 병 속에 넣을 수 있다면 / 손미희

우리들의 자리는
금방 컬러였다가
금방 흑백이 되지
방금 너랑 앉은 자리
너랑 나눈 이야기 벌써
시계바늘이 돌고
이젠 과거형

˝조금 전에…
이야기를 나눴었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어버렸던가
얼마나 많은 자리의
이야기를 잃어 버렸던가
많은 시계바늘
허물벗는 많은 키의 옷걸이를

연애도 했었어
이별도 해봤어
삼류노래 가사라고 말하지 마
충분히 당신은 인생에 진지했어
모두 다 책을 열면
대하소설 분량이 되는
그런 흑백필름 몇 통은 지니고 살지
내 필름도 몇 장 보여 줄까?

기저귀를 차고 마루의 햇빛을 주워먹었던 아기 찰칵!
꿰맨 옷을 입고 아이들과 말타기할 때 보던 골목길 찰칵!
랭보시를 읽느라 사춘기의 밥이 타는 것도 모르고 찰칵!
디제이가 있는 음악실에 내가 빠진 엘튼존 찰칵!
신델렐라 구두 찰칵!
봄동산에서 보던 라일락 찰칵!
너 찰칵! 너 찰칵! 찰칵찰칵찰칵_

시간을 병 속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흑백의 거리
가끔 꺼내서 바르고
가끔 꺼내서 마시고
첨벙 - 들어가
다시 그와 사랑하고
길게길게 입맞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