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6일 화요일
문병란의 ´인연서설´ 외
<인연에 관한 시 모음> 문병란의 ´인연서설´ 외
+ 인연서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문병란·시인, 1935-)
+ 인연
한세상 입던 옷 벗어놓고 우린 모두
어딘가로 떠나야 합니다.
마당에는 불 켜지고
이모, 고모, 당숙, 조카,
이름도 잊어버린 한순간의 친구들
때묻은 인연들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술잔이 돌고 덕담이 오가고
더러는 떠나는 것을
옷 갈아입는 거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기 전 나는 훌훌
가진 것 다 비워내고 빈 몸이고 싶습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헛된 이름인들 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헌옷 벗어 개켜놓고 그렇게
목욕탕에 갔다 오듯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김재진·시인, 1955-)
+ 인연因緣
우리는 타고 있다
가볍고 허무한 재의 전생이 이토록 육신 속에 숨어 있었다니
강원도 울울한 숲 속에서 참나무는,
날아보지 못한 닭은 거두절미하고 토막 쳐져서
이윽고 불로 화해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버리는 아우성의 불꽃놀이
길가에 타이탄 트럭
전생의 나처럼 서 있다.
(나호열·시인, 1953-)
+ 인연줄
머리로써는 알 수 없는
머나먼 과거로부터
연결되어 온 줄
있기는 있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줄
잡히지 않는 줄
질겨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줄
여전히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줄
있기는 분명히 있는 줄
(김한기·시인, 1968-)
+ 인연
꼬마애가
언덕에 서서 연을 날린다
연줄을
풀었다 감았다
감았다 풀었다
나는
연줄에 매달린 연(鳶)
아침이면
연줄을 풀어
직장에 나와
은행에 가고 관공서에 가고
저녁이면
다시
연줄을 감아
마누라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내 연줄을 잡고
감았다 풀었다 하는
마누라
하늘이 맺어준 인연.
(우공 이문조·시인)
+ 인연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 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도종환·시인, 1954-)
+ 어떤 인연(因緣)
속(俗)되지 않게
절제된 빛깔로
우리는 수묵화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대가
매(梅)를 그리고
내가
난(蘭)을,
그대가
국(菊)을 그리면
나는
죽(竹)을 그려 넣어 그렇게
우리의 인연(因緣)을 완성해가려 합니다.
(허영미·시인, 1965-)
+ 인연의 잎사귀
수첩을 새로 샀다
원래 수첩에 적혀있던 것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으며 난 조금씩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어느 이름은 지우고
어느 이름은 남겨 둘 것인가
그러다가 또 그대 생각을 했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이
묻혀지고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언젠가 내가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만나보고 싶은 까닭이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이 있겠지만
그대와의 사랑, 그 추억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까닭이다
두고두고 떠올리며
소식 알고픈 단 하나의 사람
내 삶에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 남겨준 사람
슬픔에서 벗어나야
슬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듯
그대에게 벗어나
나 이제 그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네
처음부터 많이도 달랐지만
많이도 같았던 차마 잊지 못할
내 소중한 인연이여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인연 2
그대에게 가는 이 길이
낯설지 않음은
전생의 어느 숱한 날들을
그대 향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던
그 몸짓이 가슴속에 길을
지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는 이 길이
섧지 않음은
전생의 어느 숱한 날들을
그대 위해 기도하던
그 간절함이 가슴속에
노래를 지어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는 이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지척인 듯 느껴지는 것은
그 많던 가슴속 말들이
억겁의 세월 잠자고 있다가
오늘 다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재현·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질긴 인연
꽃 사과가 눈 위에
덩그렁 있다.
겨울 바람에 악을 쓴다.
헤어지는 연습이 안 되는 그녀
인연도 질기면
웬수가 된다.
(이경자·시인)
+ 인연에 관하여
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슨 자기력처럼 오른손이 끌려나갔다
왼손과 오른손의 결합, 맥을 집듯 조심스럽다
속살과 속살이 부둥켜 흔들려야 하지만,
등껍질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물갈퀴질을 하듯 손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딸꾹질을 하는 어린 손이 흐드러지며
뚝 떨어지는 순간, 수십 수백 개의 손들이
길을 잃고 숲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서 눈물을 찔끔 흘렸을 만큼
먹이를 나르는 개미떼처럼 찾아온 손들이
그와 나를 거미줄처럼 엉켜 놓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가시처럼 따갑게 넝쿨을 쳤고
밤송이만한 꽃들이 피어났다.
(박수서·시인, 1974-)
+ 인연설
경주 천마총의
구름 밟고 달리는 천마도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어느 말사末寺에 머물었다
바람이 없는데도
도량엔 낙엽이 쌓인다
낙엽은 떨어지는 소리도 없으니
지난 여름의 영화를 돌아보는 나처럼
가볍기만 하다
아니 몸의 무게뿐만 아니라 욕심까지 놓아버린 것 같다
동승이
누가 밟기 전에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비질을 할 때마다 나비가 날아오고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쓸어내도 쓸어내도 따스한 추억은
비질을 한 자리를 덮고 또 덮는다
그건 살아오는 동안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인연이다
(함동선·시인, 1930-)
+ 보이지 않는 끈
기를 쓰고
끊으려 한다지만
보이지도 않는 그 끈이
어찌 끊기겠습니까
섭리로 묶어진 인연,
그리 애쓰지 마시어요
혓바늘이 돋은 것처럼
입안만 깔깔합니다
어떻게든
묶으려 하시지만
보이지도 않는 그 끈으로
무슨 수로 매듭을 지을까요
철사줄보다 더 질긴
인연의 사슬이
혹여, 풀릴까봐 그러십니까
가만히 놓아두어도
젖몸살처럼
겨드랑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찌릿한 아픔이 전해 오는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숙명 때문에
(최원정·시인,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반기룡의 ´추억의 도시락´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