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일요일

정연복의 ´상처´ 외


<상처 시 모음> 정연복의 ´상처´ 외

+ 상처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일이

수많은 상처로
얼룩지는 일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럭저럭 아무는 상처들.

어느 날은
상처가 깊어

이 가슴
스르르 무너지다가도

어느새 아문 상처
문득 바라보면

너더분한 상처 자국이
하나도 밉지 않아

내 남루한 생의
빛나는 보석 같다.
(정연복·시인, 1957-)
+ 상처는 밥이다

상처는 밥이다.
나는 상처를 먹고
살이 올랐다.

상처가 깊을수록
상처를 밀치고 일어나는 힘
힘이 쏟는다.
상처는 힘을 키운다.

상처는 약이다.
상처로 인해 나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상처받음으로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상처는 약이다, 힘이다, 밥이다.
(김성옥·시인, 1952-)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정끝별·시인, 1964-)
+ 구두와 고양이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반칠환·시인, 1964-)
+ 그대의 향기

나무를 보면
알 것도 같네

네 마음의 상처가
나를 편안하게
하는 그 이유

네 영혼의 흉터가
너를 향기롭게
하는 그 이유

생채기가
많은 나무일수록
뉘 기댈 그 품이
넉넉하듯이

생채기가
오래된 나무일수록
뉘 쉬어갈 그늘이
짙어지듯이

산다는 것이
너와 나의 상처를
부비며 만져주며
걸어가는 일

네 마음의
참 오래된 흉터여,

오늘은 나에게
별빛이 되라!
(홍수희·시인)
+ 상처에서 배운다

묵은 나무의 옹이를 보면
대개 상처가 안으로 들려있다
밖으로 드러난 경우라도
애써 그곳을 감싼 흔적이 역력하다
몸 일부분이기에 당연한 일일 테지만
할 수 없는 경우라도
고통의 세월 밖으로 새살을 돋아내며
아물 때까지 참아냈으리라
설사 아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라도
몸 안에서 베푼 용서가 장하다
일찍이 상처로서 몸을 지켜냈기에
옹이는 나무의 훈장과 같다
옹이를 보면 나무가 더 단단해 보인다
(이만섭·시인, 1954-)
+ 상처는 스승이다

상처는 스승이다
절벽 위에 뿌리를 내려라
뿌리 있는 쪽으로 나무는 잎을 떨군다
잎은 썩어 뿌리의 끝에 닿는다
나의 뿌리는 나의 절벽이어니
보라
내가 뿌리를 내린 절벽 위에
노란 애기똥풀이 서로 마주앉아 웃으며
똥을 누고 있다
나도 그 옆에 가 똥을 누며 웃음을 나눈다
너의 뿌리가 되기 위하여
예수의 못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오늘도 상처에서 흐른 피가
뿌리를 적신다
(정호승·시인, 1950-)
+ 상처를 위하여

저 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아닌가

제 몸통 안에
마침내 검은 우물을 파버린 나무

저 물 없는
갈라진 우물 바닥에
폐허가 연줄처럼 걸렸다

그러나,
꽃씨를 마저 흩뿌리듯
봄빛은 기어코 어김없이 쏟아져와서

바람에 잎 틔우는 새가지 떨켜마다
사람의 숨통을 틀어막는
고요

가책하는 마음들
멀어질수록

저 나무의 죄는
상처를 몸으로 만든 것이니
(김명리·시인, 1959-)
+ 아름다운 상처

너와 나의 사랑은
조용하게
새벽에 내리는 이슬처럼
고요하게 어둠 속에 깔린 안개처럼
가슴속에 하얗게 스미고 싶다.

너와 나의 사랑은
변함없이
저 산과 저 하늘처럼
묵묵히 서로의 옆에 서 있고
저 강과 저 바다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싶다.

황홀하지만 넘치지 않게,
따스하지만 뜨겁지 않게,

너와 나의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상처이고 싶다.
(심성보·시인)
+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상처받는다는 것
너를 만나고 돌아온 날도
내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깊게 깊게
구멍 뻥, 뚫렸다 그러나
피투성이 내 가슴은
어금니 한번 꽉 다물었다 침 한번
꿀꺽 삼켰다 상처받지 않고
어찌 살 속에 뼈
아름드리 벽오동나무로
키울 수 있으랴 뼛속
꿈틀거리는, 솟구쳐오르는
욕망덩어리 옳게 키울 수 있으랴
너를 만나고 돌아온 날도
내 마음은 자꾸
신음소리를 냈다 한쪽 귀퉁이
쭈욱, 찢겨져 나갔다 마른 오징어처럼
그러나 내 마음은
속삭였다 중얼거렸다 하소연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로부터 상처받는다는 것
(이은봉·시인, 1954-)
+ 상처

이제 내쫓으려네
내 가슴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산 하나
꿈틀대는 들판 하나
지줄대는 시냇물과
붉은 꽃 한 송이까지

나가지 않으려 하면
몽둥이로라도
내쫓으려네

산이 고함지르고
들판이 앙탈하고
시냇물이 울고
꽃은 아파 피를 흘리겠지

산을 뜯어낸 자리
들을 쫓아낸 자리
시냇물과 꽃이 지워진 자리
그 상처만이 내 몫이네

끝내 섭섭하시다면
빈 하늘에
빈 달걀껍질 같은 달무리 하나
놓아주려네.
(나태주·시인, 1945-)
+ 깨진 손가락

문틈에 손가락이 끼었다

이 순간 전으로 돌이킨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는 낭패 앞에
요량 없는 슬픔을 엎지르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어둠 같은 강이 흐른다

살점이 너덜거리고 깨진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외경의 피 흘리는 고통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참회
언제란 말도 없이
얼얼하게 잊고 지내다 보니

차고 기우는 저 달빛처럼
피딱지 울컥 울컥한 아픔이
꽃잎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알싸한 기억들이 망울져
그 자리에 다시 새 살 돋는 것을
(문근영·시인, 대구 출생)
+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시인, 1966-)
+ 상처의 문

내 마음밭이 거칠었습니다
내 영혼이 낮은포복하고 있습니다
어둔 강가에 세워진 나목처럼
겨울로 가는 찬바람을 그냥 맞습니다

아 지금 나의 침묵은 패배의 무게에 짓눌려
얼음강 짜개지는 신음입니다

하늘은 밤을 세워 벗어내리고
세상은 온통 순백입니다
이제는 내 거친 마음 밭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게 하십시오
삽과 호미 든 사람들 불러들여
마음껏 찧고 갈아엎게 하십시오

아픈 내 상처의 문
눈물 훔치며 열어두었나니
힘들여 내 마음밭도 갈아 엎었나니
당신의 숨결로 부드럽게 골라주어 거기에
강인한 사랑의 싹이 움터오르게 하십시오

피 흐르는 나의 상처가
내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하지 말고
그 상처의 문을 통해 더 많은 일치와
더 굳센 연대가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찍혀진 상처만큼 뜨겁고 새푸른
순결한 나의 투혼이 살아오르게 하십시오
(박노해·시인, 195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연복의 ´꽃샘추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