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일 금요일

´가을´ 외



<정연복 시인 가을시 모음> ´가을´ 외
+ 가을

하늘 저리도 높은데
가을은 벌써 깊다

말없이
자랑도 없이

나뭇잎마다 단풍이나
곱게 물들이면서

하루하루 가만가만
깊어 가는 가을.

아!
나는 얼마나 깊은가

나의 생도 고운
단풍으로 물들고 있는가.
+ 가을날의 풍경

산들바람에 연지 곤지
화장을 한 잎새들
수줍은 듯 하늘하늘 춤추고

하늘에는 조가비 껍질 닮은 구름이
해변처럼 펼쳐지고

따스한 햇살 살며시 다가와
은빛으로 부서지는 창문 너머

저 야트막한 산은
평화로이 오수(午睡)를 즐기는데

가만히 눈감으면
두둥실 떠오르는 한 사람

오!
당신의 얼굴
+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

끝없이 펼쳐진
그 순수의 도화지에

아무든지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면

나는 무심코 누구의
얼굴을 그리게 될 것인가

그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림을 그리는 내 마음은
또 어떤 느낌일까.

말없이 온 세상
굽어보고 있는 듯한

가을 하늘이
툭 던지는 화두(話頭).
+ 하늘

파란 가을 하늘은
그대로 한 장의 도화지

뭐든 맘껏 그려보라고
그분이 활짝 펼쳐 주신 도화지다

나무 잎새들마다
내려앉은

햇살은 어릴 적 엄마의
품같이 따습고

저기 우람한 도봉산도
하늘 아래 한 점 풍경을 지은

이렇게 좋은 날
나는 또 무슨 그림을 그릴까

그림 그리기가 서툰 나는
이름 석 자 적어 볼까

드넓은 하늘 아래 온 땅에서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

아내의 이름 석 자
큼지막하게 적어 볼까
+ 코스모스

코스모스처럼
명랑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순하게

코스모스처럼
다정다감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아(端雅)하게

코스모스처럼
가볍게

세월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코스모스처럼
꺾일 듯 꺾이지 않으며!
+ 들국화

삼월 목련처럼
눈부시지 않네

오뉴월 장미같이
화려하지 않네

가슴 설레는 봄과
가슴 불타는 여름 지나

가슴 여미는
서늘한 바람결 속

세상의 어느 길모퉁이
가만가만 피어

말없이 말하고
없는 듯 그 자리에 있는 꽃

찬 서리와 이슬 머금고
더욱 자기다운 꽃

한철 다소곳이 살다 지고서도
그리운 여운은 남는

인생의 누님 같고
어머님 같은 꽃
+ 낙엽

도봉산 비스듬히
다락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

서로를 보듬어 품은 채로
나란히 누운 낙엽들

뭇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푸르고 붉던 시절이야

한 점
아쉬움 없이 작별하고

초겨울 고운
연분홍 햇살 아래

저렇게 고요히
대지의 품에 안긴

너희들은
영락없는 성자(聖者)들이다
+ 낙엽을 보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너와 나

한세월
다정한 동행이었다가

우리의 목숨
낙엽 되어 지는 날

너는
나의 가슴에

나는
너의 가슴에

그저
단풍잎 한 장의

고운 추억으로
남고 싶어라
+ 낙엽을 밟으며

한철 그리도 푸른빛으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던
무성한 잎새들

한 잎 두 잎 쓸쓸히
낙엽으로 지면서도

알록달록 폭신한 카펫을 깔아
세상을 오가는 이들의 발길 아래
제 마지막 생을 바치네.

인생의 사계(四季) 중
어느 틈에 가을의 문턱을
훌쩍 넘어섰으니

이제 이 목숨도
낙엽 되어 질 날
그리 멀지 않았으리.

지나온 세월이야
더러 회한(悔恨)으로 남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

내 생의 나머지는
그 무엇을 위해 빛나다가
고분고분 스러져야 하는가.

휘익, 한줄기 바람이 불어
몇몇 남은 잎새들 지네
+ 사랑을 훔쳐보다

소요산 자재암 지나
하백운대 가는 길

가을은 벌써 깊어
낙엽은 쌓이는데

문득 바라본
저 멀리 서쪽 능선에

아슬아슬 걸친
고운 햇살.

가지 말라고
온몸으로 붙드는 능선과

이제는 가야 한다고
손사래 치면서

연분홍 눈물 쏟으며
슬금슬금 멀어지는 햇님의

쓸쓸하고도
어여쁜 연애(戀愛).

뜸을 들이면
이별도 저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