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일 금요일

서숙희의 ´밥 같은 시(詩)를 쓰고 싶다´ 외


<시인들이 이야기하는 시 모음>

서숙희의 ´밥 같은 시(詩)를 쓰고 싶다´ 외

+ 밥 같은 시(詩)를 쓰고 싶다

흐릿한 상(像) 하나를 붙들고 시름하는 밤
밤은 깊어가고 시의 문전은 멀고도 높은데
허기만 둥글게 부풀어
밥 생각이 간절하다

뜨거운 물과 불을 거쳐 쌀은 밥이 된다
서로를 처절하게 껴안고
온전히 익고 익어서 눈부시게 엉긴 살점들

시린 공복의 손으로 밥솥을 열 때 만나는
저 지순하고 뜨거운 한 사발의 찰진 욕망

그득히 고봉으로 퍼 담는
아, 밥 같은 시 쓰고 싶다
(서숙희·시인, 1959-)
+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하여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플라스틱 스티로폼 시멘트 말고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처럼 창창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발표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은 살았을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것이네

그 나무만큼 나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찼으면 좋겠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안경이 되고
신발이 되고
부엌칼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맹문재·시인, 1965-)
+ 산에 가서 시를 읽다

시집을 사 들고 산으로 간다
구름 아래로 간다

배낭에 넣고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며 가슴은 뛴다

오솔길에 들어서 발은 시 쓰듯 간다
나뭇잎을 밟고 샘물을 밟고 바람의 말을 밟는다

줄기 하얀 자작나무
아래 시집을 편다
내 눈이 읽기 전에 나무가 먼저 읽게 한다
바위틈에서 나온 다람쥐가 읽게 한다

날아가는 새가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싸리꽃이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그들의 눈빛이 밟고 간 시
그들의 깨끗한 발자국이 남은 시
물방울이 된 시를

놀빛이 밟고 나서 내가 읽는다
(이성선·시인, 1941-)
+ 긍정적인 밥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시인)
+ 오만원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말>에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가.
원고료라고 받으면 늘 이렇듯
무엇이 되었든 하나를 남기려는 버릇이 있다
오천원짜리 오백원 깎아
머리핀 하나 사고
그래도 설레임 남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당신이야, 나야, 우리 오늘 만리궁성에 갈까?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5시, 아직도 한시간이 넘게
남았다
소주라도 한잔 걸칠까, 아니야,
지 엄마만 사줬다고 딸아이가 삐치겠지
남은 돈 계산하다 말고 내친김에
석 달 전부터 점포정리를 하고 있는 신발가게로 향한다
점포정리?
정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언론을 한번 보라지
정치하는 놈들은 또 어떻고
신발장 정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던가
값이 헐한 운동화 한 켤레를 사면서도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밥 한 그릇과
딸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값을 먼저 계산해둔다
짜장면 세 그릇은 어쩐지 서러워서다
(박영희·시인, 1962-)
+ 시의 경제학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정다혜·시인)
+ 시

성공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물살같이 가슴에 아려오는 것 있어 시를 썼다
출세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슬픔이 가슴을 앨 때 그 슬픔 달래려고
시를 썼다
내 이제 시를 쓴 지 삼십 년
돌아보면 돌밭과 자갈밭에 뿌린 눈물 흔적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눈물을 이슬처럼 맑게 헹구고
아픈 발을 보료처럼 쓰다듬으며 걸어왔다
발등에 찬 눈 흩날려도
잃어버린 것의 이름 불러 등을 토닥이며 걸어왔다
읽은 책이 모두 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란 부스럼 투성이의 노인에 다가가는 것
앎은 오히려 저문 들판처럼 나를 어둠으로 몰고 갔으니

그러나 노래처럼 나를 불러주는 것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은 시뿐이다
나무처럼 내 물음에 손 흔들어주는 것은
시뿐이다.
고요의 힘인, 삶의 탕약인
(이기철·시인, 1943-)
+ 시 쓰는 애인

시 쓰는 이는 사랑하기 좋겠다
사랑을 알고 시를 쓰니까
그래서 따라온 여인
따라오면서 실망했다
사랑은 하지 않고 시만 쓰는 시인을
바닷가에 버리고 왔다
알고 보니
시 쓰는 이의 사랑은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이생진·시인, 1929-)
+ 철강 노동자

받아쓰십시오.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 끙끙거리며
좋은 시를 못 써 안달이 나신
시인 선생님.

나의 직업은 철강 노동자
계속 받아쓰십시오. 내 이름은
철강 노동자. 뜨거운 태양 아래
납덩이보다 무거운 땀방울을
흘리는 철강 노동자

당신은 생각의 냄비 속에
단어와 상상력을 넣고 끊인다지요
눈물 방울은 넣었나요 그리고
달콤한 향료는?
망설이지 말고 당신 이모님과의
사랑 이야기도 살짝 섞으십시오.

여보세요 시인 선생
나는 냄비에 시를 끊이지는 않는다오.
적어도 내가 시를 쓸 때는
거대한 용광로에 끓이지요
은유와 재치 따윈 필요도 없다오.

내가 좋은 쇠를 만들 때 필요한 것은
한 동이의 땀과
울퉁불퉁한 근육. 그것만 있으면
곡마단의 사자처럼 쉽게
온갖 쇠를 다룰 수 있지요.

조금 더 받아쓰십시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시를 쓰는지
지금 끓이는 한 덩어리의 주석이
바로 당신이 받을
원고료 한 닢!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써
주시겠오 시인 선생?
써 주신다면 나도 가만있을 사람은
아니라오. 그 대가로
영원히 닳지 않을 펜촉을 만들어 드리지요.
그 일은 아무 풋내기나 할 수 없는
무척 어려운 일이랍니다.
(장정일·시인이며 소설가, 1962-)
+ 시인의 비명(碑銘)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훌훌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배창환·시인, 195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