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원구식의 ´서울야곡´ 외


<서울에 관한 시 모음> 원구식의 ´서울야곡´ 외
+ 서울야곡

1
정충보다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휴지에 싸여 더럽기 그지없는 쓰레기통에,
냄새나는 무책임한 하수구에,
때로는 변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음의 유영을 할 것이다.
폐기된 욕망의 찌꺼기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법!
의심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통이
그대 머리 위에 있음을.
2.
정충보다 안락한 곳에 놓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따뜻한 양수 속에
자잘한 물방울들이,
이유도 없이 뽀글거리며
산소를 터뜨려 주는 어머니의 자궁,
골고다의 언덕보다 단단한 골반이
생명을 보장하는 그곳.
태고의 미역줄기들이 하염없이 떠도는 그곳,

따서 먹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그곳,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몸뚱어리를
안심하고 터억 맡길 수 있는 그곳.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그곳.
3.
봄비를 맞으면서
정충처럼 남산을 걸어갈 때,
나는 보았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십자가들이 반짝이는 서울의 붉은 밤을. 신생의 아침은 혼돈 속에 오는 것. 세상은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역사도 사랑도 이데올로기도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도저히 더 이상 썩을 것이 없을 때, 혼돈의 종결자가 더 이상 두드릴 배신의 뒤통수가 없을 때, 신생의 아침이 정충처럼 꿈틀거리며 서울의 자궁을 두드릴 것이다.

아,
어느 님이 버리셨나.
하루가 천 날 같은,
천 날이 하루 같은, 혼돈의 꽃다발을……
(원구식·시인, 1955-)
+ 서울 야경

그 참 꽃밭 같네
흐르는 꽃들도 있네
여우꼬리에 달린 불방맹이.
(나태주·시인, 1945-)
+ 서울의 개나리

서둘렀습니다
매연과 턱밑까지 깔린 아스팔트 열기
소음과 아귀다툼
빈부와 노동과 땀 서러움과 분노와
숨이 막혀 빨리 꽃잎을 내 보냈습니다
(손석철·시인, 1953-)
+ 서울記


빌딩의 숲을 보아라,
層層이 가득 찬 사람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과
어디쯤에서 만날까, 몇 時쯤에.
내려가야지, 내려가야지.
구름도 層層, 하늘도 層層이다.
(김명배·시인, 1932-)
+ 서울

하루종일
땅바닥만 보고 걸어다녔는데
녹슨 못 조각 하나 줍지 못했다

고향으로 가야겠다
(신미균·시인, 1955-)
+ 서울

기차가 지나간다
엄마가 보고 싶다

기차가 지나간다
누나가 보고 싶다

고추씨 같은 소년이
아지랑이 이는 기차를 향해
맨발로 힘껏 달린다
(정호승·시인, 1950-)
+ 서울역

모두들 한 사람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한 사람씩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도
이렇게 많은 날 서로 만나고 헤어져도
모두들 한 가지만을 생각하며 섰습니다.
모두들 한 사람씩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한 사람씩만 만나고 헤어지고 있습니다.
(도종환·시인, 1954-)
+ 서울 풍경

고층 아파트의
창틀에 물린
바람 한 조각

매연에 끄슬려
검게 타고

비둘기 목에
쇳가루가 서려
이미 녹슨 벙어리.

연기 속에 해가 떠
낮도 밤.
(문효치·시인, 1943-)
+ 서울 이야기·1

우리 앞집은 엊그제
서울로 이사를 갔다. 방배동이라나.
옆집도 오늘
서울로 이사를 갔다. 잠실이라나.
뒷집도 내일
서울로 이사를 간댄다. 반포동이라나.

이러다간 서울이 터지겠다.
서울이 뭐가 좋다고
그리 기어올라가는 걸까.
나라도 서울서 안 내려왔어 봐.
서울은 터져도 벌써 터졌지.

이제 서울은 터질 거야.
집집마다 화장실도 터지면
서울은 똥바다가 될 거야.

아빠 따라 부천으로 내려오길 진짜 잘했지.
(구미리내·시인)
+ 잘 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오오 잘 있거라! 저주받은 도시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 때 동경처럼 활활 타 보지도 못한
꺼풀만 남은 도시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은 토막이 나고 문루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 잃은 궁전을 지키지 못하며
반 천년이나 네 품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土幕)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아 잘 있거라, 한강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 모양을 길이길이 지켜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瀕死)의 도시, 나의 서울이여!
(심훈·시인이며 소설가, 1901-1936)
+ 서울역 1998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정희성·시인, 1945-)
+ 서울 편지

가을비 오고
지하철 5호선 보라색 기차 난방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뜻함이 편안한데 오히려
쓸쓸해집니다.


그치고
해 난다
환한 해 아래 편지를 읽다가
편지 들고 한참을 서서

거참, 나도 되게 쓸쓸하네.
(김용택·시인, 1948-)
+ 술 깨는 서울역 아침

어떤 문명도 저 아침 햇살을 따라잡을 순 없다
다 그 뒤에서 몸부림치는 남루들이다
새로워지려고 앞서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곤한 일이다 문명의 꿈이
아무리 밝다 해도 낙엽 하나보다 나을 순 없다
십 년 백 년이 다가와도

그것은 달이 비추는 어느 산간 동네만 못하다
서울역 아침 햇살에 술을 깨며
말한다, 너는 너무나 슬프고 아름답다

어떤 칩도 저 나뭇잎의 비밀만도 못하다
어떤 과학의 진실도 죽음만큼 신성하진 못하다
아 이 귀여운 나의 햇살들이여!
(고형렬·시인, 1954-)
+ 서울의 추억

외출해서 돌아온
내 가슴에는
언제나 가시와 화살이
박혀 있었다.

나는 옷을 벗으며
가시를 뽑아내며
화살촉의 뜨거운 피를 훔쳤다.

쓰러지며 그 전리품을
벽에 걸었다.

하늘은 늘 푸르렀고
음악이 있었지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벽에는
화살과 가시가
무성키만 했다.

가슴은 끝내 방패가 되지 못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문정희·시인, 1947-)
+ 서울의 달

가로등과 네온의 불빛에 놀라
별들은 이미 서울 하늘을 떠나고
창백한 얼굴로 비스듬히 기대어
비껴 앉은 달

나날이 비만증에 걸려
체중만 늘어난 가로등 밑으로
낙엽들이 수군거리며 몰려와 앉는데,
골목마다 천식을 앓는 달빛
억센 미련으로 그 굽은 등에 얹힌
버리지 못한 꿈은 쌓이는데,

이제껏 속아온
불면의 가슴에서
다시 돋아나는 소망이여

노숙의 변명에도
편가르기 싸움에도
앞지르는 욕심에도
말없이 달빛을 퍼주고 있는 달
미처 떠나지 못한 별 몇 개
품 안의 씨앗을 뿌리려고 땅으로 내려온다
(유창섭·사진작가 시인, 1944-)
+ 서울 별나라

서울 하늘이 찌들어서
별이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불 켜지 말고 보아라
북한산 능선이 꺼멓게 발 뻗고 잠든
아직 미명에
나 또한 수척한 어둠으로 서서
몇 개의 별과 만나고
또렷한 몇 개의 별이
더 먼 별을 보는
서울 별나라
네가 불빛이 되면
별빛이 지워진다
서로 별이기 위해
불빛을 꺼야 하리
새벽이 가까울수록 웅웅 짐승 소리로
누추하게 벗겨지는 서울의 밤
밤새도록 거리의 불빛에 시달린
불쌍한 서울의 별
사투리로 반짝이는 별무리에 숨어
순진하고 날카로운 눈매로 사는
서울 별나라
(윤강로·시인, 1938-)
+ 서울에 와서·2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몰라.
서울의 인력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양복 맞춰 입듯
내 몸에 맞는 적당한 허세와
웃음과 비굴함과 그리고 또
이웃에 대한 무관심만을
어느덧 나는 내 것으로
맞추어 갖게 되었고나.

사무실에서 화장실 거울 속에서
다방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흔들리는 잠실의 14번이나
68번 통근 버스 안에서
이제 내 그 추한 모습 또렷이 보여
찢고 싶은,
오, 시든 꽃잎 같은 일상
서울에 와서 맞닥뜨린
오자 투성이인 서른 넷의 내 생애.
(박석수·시인, 1949-)
+ 서울 말뚝에 매여

잠시 창틀에 펴놓은 백지 위에
죽음의 편린처럼 가볍게 날아와 앉는
새까만 그을음 덩이들을 본 아이들의
손에 들린 확대경처럼 동그래진 눈들!
재잘거리던 말 타래들이 걸쳐진 그대로
헤벌어진 채 다물지 못하는 그 입술들!
도망치고 싶다, 이 서울에서 나는
냇둑에 매인 흑염소 꼴이 아니라면.

내 심장을 향해 벽들이 죄어드는
관 같은 방과 천박한 것들의 쌍소리
고함과 담배 연기와 밤낮없는 소음과
가난한 이웃들을 부끄럽게 하는 자들의
교만과 사치와 방종과 불의와 부정과
온갖 악의 꽃들이 만발하는 세상
서울을 침 뱉고 떠나버리고 싶다
끊을 수 없는 인생의 고삐들이 아니라면.

얼굴 하얀 물들 해맑은 노래 따라
나들이하러 내려오는 향기로운 산바람
아침저녁 방긋방긋 인사하는 풀꽃들
재벌이 갖지 못한 생명의 정원을 거닐면서
참 오래 못 만난 눈빛 반짝이는 별들한테서
신비한 우주 이야기를 밤마다 들을 수 있는
신의 아들로 돌아가 즐길 수 있는 자연
그 거대한 성소(聖所)로 도망치고 싶다
서울 말뚝에 매인 이 몸이 아니라면.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시골과 서울

아무래도 우리는 하나가 아닌 것 같네
우리의 부모는 의붓부모가 아니건만
시골과 서울은 아무래도 의붓형제만 같네
가슴이 커서 머리가 작은 시골과
머리가 커서 가슴이 작은 서울은
같은 땅위에서 같은 세월을 살지만
서로의 눈은 너무나 다른 곳을 향하고 있네
커다란 가슴은 계산이 늦어 어둡고
커다란 머리는 계산이 빨라 비정한
사랑조차 계산기를 거쳐야 하는 시대에
시골은 시골대로 가슴으로만 살다가 어두워지고
서울은 서울대로 머리로만 살다가 혼자가 되니
아무래도 우리는 한 형제가 아닌 것 같네
계산이 늦으면 인생마저 남의 것이 되고 마는
잘도 돌아가는 계산기의 윤리 속에서
시골사람들은 죽어서도 시골식으로 구슬프게 떠나가고
서울사람들은 죽어서도 서울식으로 쓸쓸하게 떠나가니
우리는 죽어서도 하나가 아닌 것 같네
우리는 죽어서도 한 형제가 아닌 것 같네
죽어서도 우리는 한 겨레 한 국토이건만.
(홍관희·시인, 1959-)
+ 서울 사람

우리의 손끝으로 빚어 온
육 백년 역사가
북한산 넘어 뿌리 뻗은 곳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우렁찬 고함 소리에
남대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미래를 향한 호흡을 시작한다.

고궁의 처마 끝마다 떨어지는
낙숫물로 자란 애국심
인류의 꿈 전해 받은 부지런한
서울 사람들
자유와 번영을 손잡고 다시 뛸 준비한다.

휴전선 철책을 너머
북방으로 향한 길에 선봉이 되고
태평양 건너 대륙으로 뻗쳐 가는
한국의 기운도 높이 받들었으니
남산 소나무도 반갑게 팔 벌려
우리를 맞는다.

서해를 거쳐온 풍요의 구름이
마른 나뭇가지에 꽃비 되어 내리고
새들의 지저귐이 끊이지 않네
언제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축복의 터
나 영원한 이곳 사람되어
이 생명들을 보살피며
따뜻한 마음 심을 곳

경복궁 누각 끝에 앉았던 바람도
설레임으로 내려와
춤을 춘다
(신혜림·시인, 서울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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