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정소슬의 ´어머니의 국시´ 외
<국수 시모음> 정소슬의 ´어머니의 국시´ 외
+ 어머니의 국시
평상 위에 먼저
자리잡고 앉은 달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어머니 백발만 같은
국수 아닌 국시가
사발 안 비좁도록 똬리를 틀었고
허연 머릿결 사이로
쿡 질러 넣은 젓가락은 영판
어머니의 은비녀다
나는 혹, 그 쪽머리가 풀릴까봐
차마 젓지를 못하겠는데
달빛은 허기를 채우느라
후룩 후루룩 바쁘다
......어지간히 배를 채운 달빛이
저만치 비켜나 앉고
눈시울에 괸 그리움만큼 굵어진 면발이
어머니의 은비녀에 휘감겨
꾸역꾸역
목젖을 기어 넘는다.
(정소슬·시인, 1957-)
+ 국수
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 좋다
퉁퉁 부은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길 위에 자동차 꿈쩍도 하지 않고
길 위에 몇몇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오렌지색 휘장이 커튼처럼 출렁인다
빗물을 튕기며 논다
알 수 없는 때 소나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소주를 곁들일까
뜨거운 것을 뜨거운 대로
찬 것을 찬 대로
(이근화·시인, 1976-)
+ 비빔국수
밀가루로 만든 것은 국수이고
밀가리로 빚은 것은 국시라고
깔깔 그리면서 이 저녁엔
딸애가 말아 온 비빔국수를 먹었다
부침개도 얼마쯤 부쳤고
갈비도 좀 곁들였지만
더운 여름날 저녁
한바탕 웃음을 반찬으로 한
비빔국수가 특미라고 칭찬하며
바른 말로 나는 흡족해 했다
내가 국수를 좋아한 것이
언제쯤부터인지는 기억이 없다
날씨가 더우면 냉콩국수
기후가 좀 서늘하면 이바지 국수
기온이 뚝 떨어지면 수제비를 청한다
제깍 제깍 대령하는 고마운 아내
지금 내 배가 조금 나온 듯한 것은
순전히 밀가루 탓이다
아니다 그 동안
거절하지 않고 조리해주는 아내 탓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국수를 좋아하는 바로 내 탓이다
아무렴 어쩌랴
이 나이에 배가 조금 나와 보인다고 한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칼국수
어머니 오셨다
통일호 밤열차 달려
천리 길 오셨다
세 살짜리 한규 녀석
제 세상 만났다
둘러앉은 자리엔
함박웃음 넘쳐흐르는데
국수를 민다
어머니 손때 그립던
칼칼한 칼국수
어무이요, 딘장 풀까예?
그려, 호박뎅이도 좀 썰어 눠
경상도 며느리
강원도 시어머니
오늘
우리집
다정한 모녀 만났다
(고증식·교사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정진규·시인, 1939-)
+ 옛날 칼국수집
고향 냄새가 나는 듯
구수한 옛날 칼국수집
좁은 마당 가로질러
툇마루 걸터앉아 신을 벗는다
반기는 듯 마는 듯
늘 보던 정겨운 사람처럼
미소로 보내는
주인 아주머니 인사가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고리처진 낯익은 주전자
막걸리 한잔에
시커먼 속들이 씻겨진다
생존을 벗어난
이름 없는 시인들의 웃음 속에
시계바늘 너그러이 멈춰있다
풋고추 더 주세요
하는 소리에
툇마루 천정 서까래가 웃는다
(박상희·시인, 1952-)
+ 행복 칼국수집
어스름 밀려올 때 손 전화 소리울림
아끼던 제자 녀석 포장마차 열었다며
오늘은 꼭 와달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아버지 술주정에 가족은 웃음 잃고
어머니 집을 떠나 소식은 끊어지고
남동생 가출하여 함께 만든 포장마차
파주시 우체국 앞 통행로 골목길엔
갓 스물 앳된 소녀 청춘을 앞 두르고
칼국수 숭숭숭 써는 힘겨운 손놀림
입구 쪽 가슴팍에 양심을 걸어 놓고
칼국수 빚는 손길 행복한 포장마차
우리는 술을 절대로 판매하지 않아요
제자의 어릴 적 꿈 의상실 디자이너
술주정 아버지는 희망을 다시 찾고
지금은 행복을 빚는 맛 요리사 되었죠.
(최봉희·시인, 1963-)
+ 황고집 칼국수
부안 바닷가 갯벌에서
바지락 캘 때 딸려온 여자가 있습니다
산행을 마친 나는
자주 바다를 만나러 갑니다
진달래 안부를 잊지 않는 그녀
까만 눈 속에
그리운 진달래 한 송이 피었습니다
밀가루 범벅된 그녀의 손에선
동화 속 늑대도 나왔다 가고
살아온 날들만큼
함박눈이 날리기도 해서
꼬마들은 곧잘 주방을 기웃대곤 했지요
국수 솜씨만은 못하더군요
그녀의 글씨
´바지락칼국수 4000원´
천 원을 더 올리지 못하는 황고집 부부
손님들은 메뉴판에 그려진 바다를 보며
턱을 괴고 천 원어치의 꿈을 꾸고
서해 갯벌에
박아놓은 아린 조개 캐어 나르느라
남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뻘 속의 낙지가 되곤 한다더군요.
(고경숙·시인, 1961-)
+ 대전역 가락국수
늦은 밤 피곤한 몸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비닐 봉지에 담긴 국수 한 움큼을
끓는 국물에 금방 데쳐
한 그릇을 내준다
2,000원 짜리 가락국수인지라
내용이 서민적이다
단무지 서너 조각이
국수 그릇에 같이 담겨져 있고
쑥갓 조금
약간의 김 부스러기
고춧가루가 몇 개 둥둥 떠있다
시장 탓에
후루룩 젓가락에 말아 넘기면
언제 목구멍을 넘어갔는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기차를 기다리며
막간을 이용하여
먹는 가락국수의 맛은 그만이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국수
고향 찾아갈 때는
관방제 초입 포장친 집에 들러
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
처마 밑 비집고 들어서
틈서리 목로에 자리잡고 앉으면
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
그냥 왔다시며
허리춤에 묻어온 박하사탕
몰려든 자식들에게 물리시던 어머니,
훈훈한 미소 뒤에 갈앉친
허기진 그 모습
원추리 새순처럼 솟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
(강대실·시인, 1950-)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