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상배의 ´낮술´ 외


<술 시 모음> 김상배의 ´낮술´ 외

+ 낮술

이러면
안 되는데
(김상배·시인, 1958-)
+ 술

도발적인 년,
사내들이 꼼짝없이 감전되고 말아
목젖을 애무할 때
아찔한 쾌감 짜릿짜릿 고조되거든
그 맛에 흐물흐물 녹아
낙주가는 쓸개를, 관주가는 췌장을,
폐주가는 간을 바쳐 사랑하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애첩인 거야

발칙한 년,
이름도 향기도 수만 가지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사내들의 간을 다 빼먹지
간만 빼먹나
수틀리면 쓸개도 구멍내고
췌장까지 서슴없이 파먹으며 좋아하지

고얀 년,
제멋대로라니까
고약한 비법에 걸려든 사내들
도대체 물릴 줄 몰라
땅거미 울면 진저리나게 그리워
쓸개와 췌장과 간을 싸들고 맨발로 달려가지

그런데 문제는 글쎄
사내들만 사로잡는 게 아니야
십 수년 전
벼랑길에서 나도 말려들어
레즈비언 사이가 되었지 뭐야
췌장을 맛있게 갉아먹는
눈물을 아는 년, 얼마나 인간적인지 몰라
가면을 벗지 않는 오물통 세상엔
그년보다 솔직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거든
췌장을 다 먹어치운 뒤 날 내동댕이치면
끊어진 다리 누구와 건너지?
(유영금·시인, 1957-)
+ 반성·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시인, 1959-)
+ 아주 조금

나는 술을 즐기지만
아주 조금으로 만족한다.
한자리 앉아서 막걸리 한잔.

취해서 주정부리 모른다.
한잔만의 기분으로
두세 시간 간다.

아침 여섯 시,
해장을 하는데
이 통쾌감(痛快感)! 구름 타다.
(천상병·시인, 1930-1993)
+ 술잔

누군가를 위하여
가슴을 비우고 태어난
술잔.

외로운 이의 슬픔이건
즐거운 이의 축배이건
마음 맞는 사람끼리 마주앉아서
오순도순 주고받는 잔.

이승의 소금기 절인 가슴
목이 마른 갈증
가시 달린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실수록 붉게만 타오르는
너는 장미였다네.

그 누구와의 만남이든
비워서 베푸는 자리
비울수록 하늘하늘 나부끼는
꽃이었다네.
(진의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취한 사람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진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이생진·시인, 1929-)
+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술을 찾아서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마시는 소주맛
땀 흘리고 마시던 시원한 맥주맛 좋아했는데
최근 근사한 분위기에 와인까지 좋아했다
하지만 새벽이면 머리가 아팠다

소주에 콜라 타서 마시는 여자와
소주에 맥주에 타서 마시는 남자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났다가
평생을 약속하게 되었다

술잔을 입에 대는 순간
그 느낌이 좋아
술을 좋아하는 사람
사랑도 뜨겁게 할 줄 알까

서로 술잔 권하는 시간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 알게 되었다
술 중에서 가장 달콤한 술이
입술인 줄 알게 된 후부터이다
(안국훈·과학자 시인, 1956-)
+ 술잔과 입술 사이

눈빛이 통하는 술잔끼리
건배를 한다

나를 꾹꾹 눌려 담은 잔을
건네면
마음 철철 넘치는 잔이
되돌아온다

단숨에 들이키는 마음 한 잔.

오가는 눈길이
가슴에 불씨를 지핀다

입술 붉은 술잔
짜릿한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는다
(우애자·시인)
+ 아버지와 막걸리

아버지는 주당이셨다.
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도
단숨에 마시고는 간다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주조장에선
언제나 한 양푼의 막걸리는 공짜이었다.

읍내 주조장에서 막걸리를 드시고
아버지는 단숨에 시오리 길을 달려
집이 바라보이는 저수지 앞에서
쓰러져 주무시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시고 어머니는
˝저 화상! 내 속 태우려고
꼭 집이 보이는데 와서 쓰려져 자지!
내 속이 터진다! 터져!˝
하시고 악다구니를 쓰셨다.

풍채 좋으신 아버지를 동네 형들이
리어카에 모시고 와서
사랑방에 옮겨 놓으면
어머니는 북어를 두드리며
원정을 하셔도 꼭 술국을 끓여주셨다.

부지런히 달려와 곧 그 시점에서
술이 올라와 취한다는 것을
술을 전혀 못하시는
어머니는 아시고 계셨을까?
막걸리를 보면 언제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막걸리
(우보 임인규·시인)
+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 벌판에서 돌아와
소주를 마십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소주잔 속에
수박 씨앗을 뿌리면서
어머니가 말립니다 왜 그래요 여보
그러면 떠내려간 것이 돌아오나요 기다려 봐요
한번만 더 참아요 네 여보

식물은 자라기 위해
물과 햇빛과 공기가 필요한데,
아버지 눈물도 흘리지 않으셨는데
웬 눈물을 모아 마시나요 소주를 자주 마시나요

이제 곧 수박이 열릴 거야
기다려봐
기다려보자

멀리서
빈 가슴만 남은 들판이
온통 젖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런데 아버지의 소주잔 속에는
수박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맑은 소주가 넘쳐
우리들 가장 서러운 데를 적시는데
등뒤에 홀로 벌판을 지고
아버지는 소주를 마십니다
(안도현·시인, 1961-)
+ 술 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바라보고 한숨짓는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아일랜드 시인, 1865-1939)
+ 서울막걸리

홀로 마시는
막걸리도 내게는
과분한 행복이지만

벗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더욱 황홀한 기쁨이다

나를 내 동무 삼아
집에서 혼자 따라 마시는
서울막걸리는
왠지 쓸쓸한 우윳빛

하지만 벗과 눈빛 맞대고
서로의 잔에 수북히 부어주는
서울막걸리는
색깔부터 확 다르다

벗과 다정히 주고받는
투박한 술잔에 담긴
서울막걸리의 색깔은

남루한 분위기의
희뿌연 술집 조명 아래에서도
왜 그리도 눈부신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뽀얀 살결 같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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