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6일 수요일

도종환의 ´오프라인증후군´ 외


<세태에 관한 시 모음> 도종환의 ´오프라인증후군´ 외

+ 오프라인증후군

도심에 들어서면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미끄러진다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짧은 동안
내 몸은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하다
지하철에서는 어떻게든 몸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퇴근길에 화물이 된 몸들 사이에 빼곡이 끼어 있으면서도
나는 연신 주문을 외운다
닿지 않았다고 닿은 게 아니라고
타자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서서히 경직된다 겉돈다
웃어도 안 되고 긴장을 풀어도 안 되는 내 얼굴
내 피톨들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토사물처럼 문 밖으로 토해지곤 한다
나는 기도로 잘못 들어간 음식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밀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면
나는 다시 활기를 찾고 치아는 생기에 넘친다
근육은 명랑해지며 여유는 제 얼굴을 되찾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편안해지는 목소리
무선으로만 소통이 가능해지는 짧은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경계하며 거리를 걷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유령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그림자를 끌고 간다 오프라인에서
어쩌면 나도 유령인지 모른다
(도종환·시인, 1954-)
+ 시래기 한 움큼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공광규·시인, 1960-)
+ 지하철에서

´세계화의 첫걸음은 말
한마디의 외국어가 세계화를 앞당깁니다.´
공보처에서 만든 선전물에는
갓 쓴 할아버지가
하우 두 유 두를 말하고 있고
헤드폰을 귀에 꽂고
연신 다리를 주억거리는
젊은이는 멍한 눈으로
스포츠조선 스포츠한국에서는
이런 저런 만화들이
몸을 비틀며
뜨거운 신음을 토하고 있고
바짝 붙은 몸과 몸 사이에서
모르는 사이 조금씩
증오심을 키워가면서
우리는 그것이
생활인 줄 알고 있다.
(조영옥·교사 시인)
+ 무서운 말

게임 아바타 빌려주고
떡볶이 얻어먹으며
˝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쉽게 말했는데

아빠 어릴 적 이야기 들으면

콜라와 주스 얻은 대신
구수한 숭늉 잃고
컴퓨터 게임 얻은 대신
골목길 친구들 웃음소리 잃고
편리한 자동차 얻은 대신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 잃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


무서운
말이다.
(박선미·아동문학가)
+ 속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일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왜 백미터를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침내 비닐하우스 속에
온 지구를 구겨 넣고 계시는,
스스로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시는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이원규·시인, 1962-)
+ 가을 청문회

조금 더러운 사람이
많이 더러운 사람을 야단칩니다
좀더 깨끗해질 수 없냐고,

못생긴 사람이
좀더 못난 사람을 비웃습니다
좀더 아름다워질 수 없냐고,

오글오글 떠드는 모습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습니다
(나호열·시인, 1953-)
+ 도시의 여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간편한 바지를 입을까,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현란한
스커트를 입을까,
머리를 풀어헤쳐 사자 흉내를 내본다.
머리를 틀어올려 꽃뱀 흉내를 내본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세는 아무래도
IMF
맞붙어 싸우고 명예퇴직을 당하기보다는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는 뱀이 더
현명하겠다.
출근길,
날렵하게 스커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보는 도시의 여자,
무슨 탈을 쓸까,
붉은 루즈를 입에 물고
우는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웃는 얼굴,
슬픈 얼굴 위에 그려 넣는 즐거운 얼굴,
(오세영·시인, 1942-)
+ 나쁜 운명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야 불문가지)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하지 않고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지배´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정현종·시인, 1939-)
+ 다시 사랑을 위하여

모두들 남을 위하여
가슴을 연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구하고
이 뒤틀린 사회를,
어둠의 나라를 일으켜
새롭게 세운다고 한다. 목에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지른다. 자기 하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웃과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그런데 유독 그는
말이 없다. 풀이 죽어 바보처럼,
말에 떠밀리어
앉아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남들을 위해 술잔을 기울인다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는 그저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들을 향해 중얼거린다.
누가 누구를 위하고 있는지,
이 시대에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왜 자기를 남이라고 부르면서
남을 짓이기고 있는지......
따스한 가슴이 없는 시대의
이 소음 소음 소음, 어둠의 소용돌이여.
사랑을 잃은 세월의 앙금이여.
그리운 사랑의 나라,
사랑의 마을이여.
(이태수·시인, 1947-)
+ 수의 패션쇼

강남 한복판에서 수의 패션쇼가 열렸다
죽음의 옷이 산 사람을 꿰입고
휘황찬란 조명 아래 활보한다
산 사람이 죽음의 옷 속에 담겨 조용히
전시중이다 사람들은
수의 위에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조명발을 받은 수의는 이 세상처럼 환한데
수의 속 산 사람의 몸은 무덤처럼 캄캄하다
이제 죽음은
빙초산 맛 같은 불빛 아래 진열되는
상품이 되었다, 나는 후일
어떤 디자인에 맞춰 임종하게 될까
턱시도 수의, 드레스 수의, 무궁화 자수가 만발한
거들치마 수의
대로변에 버젓이 검은 입 벌리고 대기중인 납골묘
아직 새파란 사람들이 저축하듯 유서를 쓰고
영원한 안식인 죽음은
죽은 몸 부릴 곳조차 없다, 상여 붙잡고 울 틈도 없이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 번쩍번쩍 요란한
박수 소리만 흘려 보낸다
(이해리·시인, 경북 칠곡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오정방 시인의 전쟁시 모음 "> 서정윤의 ´노을´ 외 ">